30부 — 심장의 방

이미지
문 앞에서 29부에서 눈부신 빛을 거부하며 눈가리개로 진실을 지켜낸 우리는 드디어 마지막 문 앞에 섰다. 문은 돌이 아니라 심장처럼 울렁거렸다. 표면이 마치 고동치듯 미세하게 떨렸고, 가까이 다가가자 귓가에 심장 박동 같은 진동이 퍼져왔다. 문 위엔 짧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심장을 열어야 증언은 완성된다.” 의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 이상 감각이 아니야. 이번 방은 우리 존재 자체를 요구한다. 목소리도, 눈도, 귀도 아닌… 심장.”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마지막 증언이자 최종 심판이야. 우리가 증언자라면, 결국 자기 심장을 열어 보여야 해.” 심장의 울림 문이 열리자, 방 안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아무 장치도, 아무 가구도 없었다. 대신 벽 전체가 심장처럼 붉게 빛나며 박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 다섯 명이 들어서는 순간, 박동은 우리 각자의 심장과 동조되듯 강약을 바꿨다. 은서가 놀란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가슴 안에서 뭔가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 벽에 글자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은서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노래하는 자의 심장 위에도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너의 노래는 증언인가, 변명인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행동하는 자의 가슴에선 또 다른 문장이 피어났다. “네 상처는 증거인가, 폭력인가?” 방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증언자로서의 마지막 확인 이었다. 심장을 열다 기록하는 자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열 듯 두 손을 벌렸다. 그의 심장 위에서 오래된 잉크 자국이 글자로 변했다. “나는 기록했다. 내가 남긴 것은 거짓이 아니다.” 벽이 그의 글씨를 받아 적으며 붉은 빛을 더 강하게 뿜었다. 노래하는 자도 마침내 눈을 감고 노래를 흘려냈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의 심장 위에서 빛이 노래처럼 퍼졌다. “내 노래는 고통이었고, 동시에 증언이었다.” 행...

29부 — 눈부신 어둠의 방

이미지
빛의 과잉 28부에서 청각을 잃고 겨우 손글씨로 증언을 이어간 끝에 우리는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29부의 시작은 정반대였다. 이번엔 침묵 대신 눈부신 빛 이 쏟아졌다. 처음엔 해돋이처럼 찬란했으나 곧 우리 시야는 새하얀 막으로 뒤덮였다. 눈꺼풀을 감아도 소용없었다. 과잉된 빛은 어둠과 다를 바 없었다. 의사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이건 눈을 빼앗는 방식이야. 빛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지.’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끔찍해요. 지금은… 가짜가 다 진짜처럼 보여요.” 우린 손을 맞잡았지만, 이번엔 감각조차 왜곡됐다. 서로의 손등에 문자를 새기려 했으나, 눈부심 속에 손가락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방은 과잉된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우릴 혼란에 빠뜨렸다. 빛으로 쓰여진 거짓 앞을 더듬다 우리는 거대한 벽을 만났다. 그 위에는 수많은 문장이 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우린 실패했다.” “네 목소리는 쓸모없다.” “너희의 이름은 지워졌다.” 모두 빛으로만 새겨진 문장이었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지현이 이를 악물며 손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저건 가짜야. 진짜 기록은 빛에 새겨지지 않아. 몸과 목소리에 남는 거야.’ 기록하는 자가 허공에 종이를 꺼내 글씨를 남기려 했으나, 종이는 금세 빛에 녹아 사라졌다. 은서가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우린 빛을 거부해야 해. 보이지 않아야 진짜를 붙잡을 수 있어.” 자발적 눈먼 자 행동하는 자가 재빨리 옷자락을 찢어 눈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눈가리개를 만들어 우리 모두의 얼굴에 씌웠다. 처음엔 공포스러웠다. 빛이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칠흑처럼 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다. 의사가 손끝으로 글씨를 새겼다. ‘자발적으로 눈을 가려야 진짜가 보인다.’ 이 문장은 우리 모두의 심...

28부 — 귀머거리의 방

이미지
소리가 끊긴 순간 27부에서 이름을 지켜내며 돌문을 열자, 이번엔 정반대의 감각이 무너졌다. 돌문을 통과하는 순간, 귀를 꽉 막는 듯한 압력이 몰려왔고, 그 뒤엔 완벽한 침묵 이 찾아왔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심지어 심장의 박동조차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 손끝의 떨림만이 우리가 아직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은서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말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공포를 드러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입술을 크게 움직여 보였다. “괜찮아. 우리가 아직 여기 있어.” 하지만 그녀가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청각을 빼앗아 증언의 도구를 무너뜨리는 방이었다. 이전까지는 목소리와 이름이 우리 무기였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몸짓과 기록만이 진실을 전달하는 수단 이 되었다. 몸짓의 언어 우린 급히 서로의 손바닥에 글자를 새기듯 쓰기 시작했다. ‘괜-찮-아.’ 은서가 내 손에 또박또박 글자를 그렸다. ‘우-린-같-이.’ 그렇게 우리는 손바닥의 필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곧, 낯선 손길이 끼어들었다. 누구의 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차갑고 거친 손끝이 내 손등에 이상한 글자를 새기려 했다. “거-짓-말.” 순간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 나는 재빨리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지만, 귀가 닫힌 방에서는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오직 촉각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우리는 각자 손바닥에 ‘X’ 표시를 새겨 낯선 손길은 믿지 말자 는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거짓 기록의 그림자 앞을 더듬어 나아가던 중, 발밑에 두툼한 책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끝으로 넘긴 책장은 모두 비슷한 글귀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린 패배했다. 우린 잘못했다. 우린 침묵해야 한다.” 기록하는 자가 얼굴을 굳히며 글자를 적었다. ‘이건 그들이 만든 거짓 기록 이야. 우리가 믿도록 강요하는 문장.’ 그는 손끝으로 책장을 찢어냈다....

27부 — 눈먼 방

이미지
빛을 잃은 시작 안개를 가르고 들어온 순간, 우리의 시야는 서서히 닫혔다. 처음에는 주변의 경계가 흐려지더니, 이내 모든 형태가 잉크 번진 종이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차갑고 거친 바닥의 감촉, 그리고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 의사가 낮게 말했다. “예상대로야. 이번 방은 시각을 제거해 남은 감각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거지.” 지현이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누군가 우리를 끌고 가려 해도 눈으론 막을 수 없어. 대신, 귀와 손, 이름으로 버텨야 해.” 은서는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을 찾았고, 다시 하나씩 팀원들에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를 잇는 순간, 안개 속에서 먼 울림이 들려왔다. “—누가 처음 목소리를 불렀는가?” 방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감각을 빼앗는 기만 천장에서 미묘한 바람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똑같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눈을 잃은 대신 귀를 믿어야 하는데, 소리는 분명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는 착각을 주었다. 행동하는 자가 낮게 외쳤다. “모두 제자리에! 움직이면 패턴에 먹힌다!” 그러나 이미 한 발자국 늦었다. 기록하는 자가 비명을 억누르며 말했다. “내 팔을 누가 잡아—!” 하지만 곧 알았다. 그것은 실제 손이 아니라, 공기의 압축과 울림이 만든 환영의 손 이었다. 의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청각과 촉각을 혼동시키는 장치다. 여기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 하나— 이름 으로 불러 확인하는 것.” 나는 즉시 은서의 이름을 불렀다. “은서!”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여기 있어!” 이름이 진짜 존재를 증명했다. 사라지는 동료, 그리고 되찾기 우린 이름을 서로 불러가며 한 줄로 전진했다. 그러나 노래하는 자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여… 기…” 그 뒤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은서가 당황해 외쳤다. “어디 있어요?!” 방은 그의 목소리를 조롱하듯 반향으로 되뿌렸다. “여기… 여기… 여기…” ...

26부 — 목소리가 돌아오는 방

이미지
문턱에 선 숨 문이 열리자 바람도 없는 공간에서 얇은 공기의 물결이 우리 얼굴을 스쳤다. 방은 넓지 않았지만 층층이 포개진 아치가 깊이를 끝없이 늘려 보이게 했다. 천장에서 늘어진 오래된 스피커들은 전원이 빠진 채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바닥 중앙에는 둥근 원형 무대가 깔려 있었다. 무대 둘레엔 유리관이 사방향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안을 흐르는 것은 전선도 물도 아닌, 잔잔한 잔향과도 같은 빛의 먼지 였다. 침묵의 복도를 지나오며 메말랐던 귀가 순간 웅 하고 미세한 저음을 느꼈다. 지현이 손바닥으로 공기를 가르며 속삭였다. “여긴… 소리를 되돌리는 곳이야.” 아직 우리 목소리는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직전의 완전한 무음은 아니었다. 한 음절씩,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던 침묵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느낌. 의사는 벽에 박힌 금속판의 주파수 눈금을 살피더니 턱짓했다. “청각 자극 복원… 단계적. 너무 빨리 말하면 역류가 일어나.” 기록하는 자가 목울대를 쓸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가 방 안에서 둥글게 퍼졌다. 은서는 녹음기를 가슴에 꼭 붙였다. 빨간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아주 낮게 기계의 심장 같은 맥박이 전해졌다. 반향 기계와 이름의 위치 무대 위에 난간만한 높이의 기계가 놓여 있었다. 표면엔 스크래치와 각인, 그리고 낡은 라벨: REV-CHAMBER / 인가 없는 재생 금지 . 내부 증언자가 어깨를 기울여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원통형 공명관이 세 겹으로 겹쳐져 있고, 중앙 링에는 작게 각인된 좌표가 줄지어 있었다. “PLATFORM 3 / 08 / H-308 / 발화 / 메아리 방 / 검은 서명” —우리가 지나온 문장들의 목록. 행동하는 자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우릴 위해 설계됐다는 듯… 아니, 우릴 다시 설계하려는 장치야.” 그때 무대 아래쪽에서 푸른 불빛이 켜졌다. 바닥의 원형 홈이 돌면서 우리 발 위치를 규정하려 들었다. “서 있지 말고 서게 하려는군.” 지현이 반원을 그리며 우리를 재배치했다. “원...

25부 — 침묵의 복도

이미지
소리가 사라진 길 우리가 들어선 복도는 기묘했다. 발걸음을 옮겨도 발소리가 없었고, 손가락이 벽을 스치는데도 아무 울림이 없었다. 은서는 두려움에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공기 자체가 소리를 삼키는 듯했다. 지현이 미리 정해둔 신호를 꺼내 들었다. 두 번 두드리면 정지, 세 번은 우회, 한 번 길게는 후퇴 없음.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의지하며 무음 속을 걸어갔다. 복도의 벽은 하얀 대리석처럼 매끈했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균열이 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균열 안에는 마치 잉크가 굳어 검은 실핏줄처럼 박혀 있었다. 행동하는 자가 손으로 그 금을 더듬자, 미세하게 떨림이 퍼졌다. 그러나 그 떨림마저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몸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의사가 손바닥에 작은 손전등을 비추며 기록했다. “여긴 청각 차단만이 아니라, 증언의 원천 을 고갈시키려는 장치야. 목소리 없는 자는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되지.” 기록하는 자가 펜촉을 꾹 눌러 종이에 선을 그었다. 그 소리마저 나지 않았지만, 글씨가 남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조금 안심시켰다. 보이지 않는 관객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작은 원형 홈이 파여 있었다. 원 안에는 발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찍혀 있었고, 그 크기와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내부 증언자가 몸을 굽혀 살폈다. “이건 단순한 흔적이 아니야. 우리 이전에 통과한 자들이 남긴 ‘무음 발자국’이지.” 갑자기 등 뒤에서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소리는 없었지만, 확실히 누군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봤을 때, 복도의 끝자락에 수십 개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의자 등받이에 희미하게 눌린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관객 들이 거기 앉아 있는 것처럼. 은서가 손으로 녹음기를 움켜쥐었다. 기계는 침묵했지만, 빨간 불빛이 여전히 깜빡이며 살아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공연하는 무대 같아요...

24부 — 심연의 두 번째 시험

이미지
가라앉는 계단, 떠오르는 이름들 문턱을 넘자 바닥이 아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이 아니라, 거대한 승강판이었다. 사방 벽면에는 오래된 플라스터 위로 이름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슷한 획, 비슷한 높이, 그러나 분명 서로 다른 손끝의 떨림. “선택을 미룬 자들” 이라는 표식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 번졌다. 은서는 한 이름 앞에서 멈추었다. 박해문 .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가 멈췄다. “아빠가… 여기를 지나갔어요.” 지현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훑었다. “각인은 ‘통과’의 의미일 수도, ‘구속’의 의미일 수도 있어. 아카이브는 늘 두 개의 문을 동시에 만들지.” 행동하는 자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계기를 살폈다. “내려가는 속도, 일정해. 3:08에 맞춰 심층부와 동기화하려는 거야.” 내부 증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기록과 기억, 그리고 목소리가 서로의 경계선을 녹인다. 우리가 들을 소리는 우리 것이 아닐 수도 있어.” 노래하는 자는 갈라진 목으로 아주 낮은 으음음을 흘려 우리 호흡의 리듬을 묶었다. 그 단조로운 음이 공포를 눌러 주었다. 반전 기록실 — 읽히는 자가 기록된다 승강판이 멈추자 앞에 아치형 문이 열렸다. 안쪽은 밝았다. 기록열람실 이라는 명패가 문틀에 박혀 있었지만, 내부 배치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책상 위엔 열람자 기록카드가 있었고, 카드마다 글씨가 쓰이다 중단된 흔적이 선명했다. 기록하는 자가 카드를 집어 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선 읽기가 곧 쓰기야.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의 망설임과 시선까지 기록 된다.” 의사가 주변을 돌며 필터 박스를 열었다. “공기 중에 미세 잉크 입자… 흡입하면 혀 밑 점막을 통해 문장 패턴이 박힌다. 읽는 사람의 내적 독백이, 반대로 저장돼.” 은서가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현이 말없이 마스크를 건넸다. 내부 증언자가 벽면의 유리 진열장을 가리켰다. “여길 봐. ‘반대 증언’ 섹션.” 진열장 안에는 손바닥만 한 판막들이 줄지어 있고, 각 판막에는 단문들이 새겨져 있...